체코 프라하 카를4세
체코 프라하 카를4세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루카 인근
몬테카를로라는 요새가 있다.
몬테카를로는 요새를 세운 카를4세의 이름을 딴 요새이다.프라하 블라타강에 세워진 카를교도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카를4세의 치적은 이밖에도 현재 형식의 프라하성 건축 기초를 세운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신성로마제국황제로서 프라하를 당시 유럽에서 로마, 콘스탄티노플 다음의 세번째 도시로 만든 것처럼 보헤미아(체코)왕국의 가장 번영했던 역사를 이룩하기에 이르른다.
880년 성립된 프르제미슬 왕조가 무너지고 룩셈부르크 왕조를 세운 얀의 아들로 태어난 카를4세는 아버지를 따라 백년전쟁에 참가하기도 하는데 프랑스의 칼레에서 아버지 얀이 사망하고 전장을 빠져나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르게 된다.
카를4세는 당시 마인츠대주교의 영향을 받았던 프라하의 주교좌를 대주교좌로 격상시켜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후에 종교개혁가로 후스 전쟁의 계기가 되었던 얀 후스가 다녔던 유럽최초의 대학인 프라하 카를대학교를 세운다. 이밖에도 비투스대성당, 카를슈타인 성을 세우고 브란덴부르크, 룩셈부르크, 루사티아, 실레시아 등의 영토를 확장한다. 이로써 카를4세는 체코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 보헤미아의 왕, 로마의 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이탈리아 왕, 부르군디 왕 등 많은 지위를 갖게 된다.
카렐 4세는 금인칙서를 발표해 제국의 황제 선출을 명문화하여 19세기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제국의 기틀이 되는 원칙을 마련했다.카렐 4세 시기에 와서 보헤미아 왕국은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카렐 4세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면서, 보헤미아가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카렐 4세는 프라하를 확장시켰으며, 비투스 대성당 등 많은 건축물을 증축, 신축했다.
카를교를 건너면서 사방에 강력한 제국들에 둘러쌓인 지형조건에서도 보헤미아왕국을 최강의 왕국으로 부상시킨 카를4세를 떠올리며 이후 기울어져가는 이유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 후 질곡의 역사를 지나온 체코공화국이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때를 기념하고 목표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된 제국의 국경선은 현재의 분쟁선을 보여준다는 로버트 카플란의 말처럼 역사는 현재의 동력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