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서경천도운동 간단하게 알아보는 상식
고려는 17대 임금인 인종이 죽은후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밖으로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고려 내부적으로는 문번 귀족이자 왕실의 외척인
아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동요하여
불안한 시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을(앞날의 길과 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사상)을
익힌 서경출신의 (평양) 승려 묘청이 인종에게
서경으로의 천도를 권하였습니다.
묘청의 땅의 기운이 약하여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하며, 임금을 황제라고 불러 국가의 위신을
세우고,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였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은 이를 지지하는 서경파의 정시장,백수한 등의
동조로 인하여 인종의 마음을 움직이게 됩니다.
이리하여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까지 짓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의 실세인 김부식등 개경파 문번 귀족들의 반대와
대화궁에 벼락이 떨어지고, 인종의 서경 행차 도중
폭풍우로 사람들돠 말이 다치는 재난이 잇따르자
서경 천도 계획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서경 천도가 불가능하게 되자
묘청은 1135년 자신을 믿고 따르는 조광,유참 등과 함께
서경에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토벌군 대장이 된 김부식은 먼저 개경의 서경파를
제거하고, 조광을 회유하여 묘청을 죽이게 하였습니다.
이후 조광이 이끌던 반란군도 김부식의 관군에게 패하여
1년 만에 묘청의 난 은 진압이 되었습니다.
$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 은 실패하였지만
칭제 건원(황제라고 하고 연호를 정함), 및 금나라의 정벌 등
자주 정신이 담겨 있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 묨청의 난 은 부패하고 보수적인 문벌 귀족 사회에
대항한 운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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